제목 [역사와 사진] 망월사, 그 복원의 시작
작성일자 201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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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진] 망월사, 그 복원의 시작


폐허의 역사조차 밝힐 수 없는 불운한 가람의 역사는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1945년 8·15 해방이후 한 청신녀가 가람의 옛터에다가 토굴에 가까운 자그마한 법당을 마련, 불상을 모시고 그 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조선조 유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 선생의 15대손으로 승려가 된 성법선사께서 오랜 수행과 공부 끝에 그 학덕을 널리 인정받아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모두 9과의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수하고 귀국한 이후 2년여 동안 봉안처를 찾아 전국산천을 답사하던 중 1984년 어느 날, 꿈에 부처님이 현신하시어 망월사를 일러 주시자 그 이틑날로 망월사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옛 가람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허물어져 내린 축대만 남았지만 이곳은 부처님의 인도가 계신 터이므로 낙심하지 않고 이 터를 일구어 사리를 봉안하고 사찰을 복원하여 불법의 전당으로 삼고 오로지 일생을 호국일념으로 살다 가신 각성선사의 뜻을 이어 받아 통일기원도량으로 삼으리라는 서원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각성선사의 중수(중창)이후 복원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서원은 세웠으나 연약한 비구니의 몸으로 대가람을 복원시킨다는 것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정성이 지극하면 금석이라도 뚫는다는 옛말을 신념으로 이곳에 머물며 불철주야 서원정진을 계속하던 중 각성선사의 현몽이 있자 더욱 서원을 굳게 세우고 가람의 복원을 필생의 소임으로 작정, 불사를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성법선사께서는 근근이 마련해 두었던 불사금과 사재를 털어 절터를 인수했고 이러한 선사의 뜻을 이해하는 불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먼저 신도회를 중심으로 「망월사복원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복원계획안의 수립과 함께 기초조사에 착수함으로서 복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적발굴 및 寺地조사>

고찰의 복원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유적에 대한 발굴과 사지조사였습니다. 옛 가람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폐허가 된 곳이었기 때문에 복원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지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유적의 발굴이 급선무였습니다.

이에 성법선사께서는 동국대학교 유적발굴조사단(단장 문명대 교수)에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러나 탑이나 비문 하나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절터에서 사찰의 역사와 유래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추의 위치로 보아 金堂은 대략 24평 정도의 규모였고 대웅전은 대략 80평 정도의 규모였음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옛 가람이 어느 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어떠한 특징을 띠고 있었는지 자세한 것은 밝혀내지 못했고 다만 주추의 배열, 건물의 크기, 방향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건축양식에 가깝다는 추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일부 남아있는 축대 등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축조 연대는 대략 7~8백년 쯤 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폐허가 되어버린 상태였고 비문 한 조각 발견되지 않아 伽藍考(조선중기의 학자 신경준이 지은 우리나라 절에 관한 자료집)에 나타난 기록 이상의 것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조사팀은 폐허의 직접적인 원인은 화재였던 것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그 시기는 대략 장경사 진남루가 화재를 당한 1907년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진남루가 화재를 당할 무렵 본사(망월사)도 화재를 당했다면 최소한 건축물의 편린이라도 발견되었을 것이지만 한 조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파손연대를 1900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당시 장의사에 옮겨왔다는 불상·금자화엄경·金鼎(쇠로 만든 솥) 등의 역사를 밝혀보려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찰 사지에서는 석불·석탑·비석·부도 등으로 사찰의 역사를 밝혀내는 것이 통례이나 역사적 단서로 삼을 만한 것은 이상할 정도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직경 167 센티미터의 대형 맷돌 하나와 화약을 만들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석틀, 그리고 깨진 도자기와 기와 등이 발굴된 유물의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조사팀은 본사에 있던 것 중 운반 가능한 것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거나 보물급에 해당되는 것은 해외로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조사결과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 조사기간(1989~1991) 2년 동안 3차에 걸쳐 조사하고 도굴범들에 의한 2~3차례의 도굴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함. (문명대 교수 작성 ‘망월사지발굴조사보고서’ 참조)
※ 금당 터 및 대웅전 터 발굴시 출토된 기와와 도자기 조각들 중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일부 유물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였음.

<복원계획수립>

사지발굴조사단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복원계획을 수립, 1989년 계획안을 확정했습니다. 이 계획은 1차로 극락보전(금당)을 복원하고 그 다음 선방 및 강원으로 사용할 요사채를 복원하며, 2차로 사리보탑을 조성, 사리를 봉안하고 3차로 적멸보궁 대웅보전을 복원하기로 확정했습니다. 대웅보전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순차적으로 조사당, 남순당, 누각, 주지실, 종각, 승방, 관음전, 일주문 등을 복원 또는 신축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와 함께 본사 復元主인 성법선사께서 비구니이시므로 앞으로 본사는 비구니수도도량으로 선원을 운영하며 불법을 전파해 나가기로 확정했습니다.

※ 복원계획설계도 별도관리 (설계도작성: 태창건축사사무소, 도면: 현황배치도 등 총 24매)

<문화재 지정>

한편 본사는 고찰사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호국사찰 사지로서 계속적으로 보존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망월사지」를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당국에 요청, 서기 1988년 12월 ‘경기도 기념물 제 111호로 지정 공시되어 당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문화재 지정으로 일부 형태만 남아있던 축대의 보수 및 복원이 당국의 지원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불상의 放光과 불사>

복원불사의 서원을 세우고 불사성취기도를 시작한지 얼마 후 혼례법회가 진행되는 도중, 임시로 지은 법당의 단상에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觀世音菩薩像 등 불상이 방광을 시작하여 약 30분 동안 찬란한 빛을 발하자 뜻하지 않은 부처님의 법력에 법당 안에 있던 스님 및 30여명의 불자들이 모두 놀라고 환희하며 불사복원이 원만히 성취될 것을 예시한 것이라며 기뻐했습니다. 이때 불자 중의 한 사람이 방광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전까지만 해도 행정당국이 개발제한구역 등 현행법상의 이유를 들어 일부 공사의 허가를 미루고, 일부 공사가 진행 중인 터를 원상복구하라는 독촉을 수차례나 하며, 진입로 확장조차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해 공사에 차질이 있을 것을 우려하던 때였는데, 방광이 있고 난 후, 당국이 방침을 선회, 진입로 확장은 물론 공사가 일괄 허가되자 선사의 불사에 대한 염원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부처님의 법력이 이 일을 도와주신 것이라고 기뻐했습니다. 이 방광은 복원공사 내내 어려움을 극복하고 매진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또한 방광이 있은 지 얼마 후 한 불자의 인도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모친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성법선사로부터 사지복원의 서원과 필요성에 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노대통령의 모친은 아들인 대통령에게 복원의 기틀을 마련해 줄 것을 주청하였고, 이에 대통령은 형이 되는 노재우 거사를 이곳에 보내서 복원계획과 지원방안을 검토하도록 하였고,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에게 후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후 조중훈 거사가 본사를 직접 방문하여 성법선사께서 세운 복원의 참뜻을 이해하고 복원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약속함으로서 大作佛事가 시작되었으니, 불상방광은 곧 불사성취의 서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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